시리즈 1편부터 5편까지를 안 보신 분들을 위해 한 줄로 요약하면 — 70년 동안 인공지능 분야는 두 갈래로 갈라져 왔다는 이야기였다. 한쪽은 신경망에 데이터를 충분히 먹이는 사상, 다른 쪽은 신경망 위에 자기 미래를 두어보는 회로를 얹는 사상. 1편에서 우리는 1956년 다트머스에서 인공지능이라는 단어를 함께 만든 마빈 민스키와 존 맥카시가 1986년에는 이미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는 이야기로 시리즈를 열었다. 그 두 갈래가 40년이 지나 OpenAI와 Anthropic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같은 자리에 서 있다는 결론이었다.
그 1편 이후 다섯 편을 지나면서 우리가 도달한 좌표는 이렇다. 두 사상은 한 머릿속에서 통합되어야 비로소 살아있는 결정이 나온다. 5편에서 우리는 또 한 명의 거장 얀 르쿤(Yann LeCun)이 카파시의 추론 회로 답에 대해 "회로조차 답이 아니다, 신경망 안에 세상의 모형을 직접 만들어야 한다"고 던진 카운터까지 봤다.
6편에서는 그 카운터의 한 단 더 깊은 자리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본다. 그가 던지는 질문은 짧다. 세상의 모형을 머릿속에 만들어도, 결국 결정을 내리는 자리에는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는 것. 그 한 가지가 없으면 어떤 시뮬레이션도 어떤 추론 회로도 살아있는 결정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
그 한 가지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가 어떻게 그 답에 도달했는지, 그리고 그 답이 지금 우리 책상 위의 챗봇에 무엇을 빠뜨려놓고 있는지를 6편에서 풀어본다.
그 사람의 이름은 안토니오 다마지오(António Damásio). 1944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태어난 의사이고, 미국 아이오와 대학병원과 USC 뇌·창의성 연구소에서 40년간 한 가지 질문을 풀어온 신경과학자다. 그가 평생 풀어온 질문을 한 줄로 옮기면 이렇다 — 결정이라는 일은 도대체 우리 몸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1막. 1848년 — 한 쇠막대가 한 사람에게서 결정을 빼앗아간 날
1848년 9월 13일, 미국 버몬트주의 한 철도 공사 현장. 25세 십장이 다이너마이트로 바위를 깨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피니아스 게이지(Phineas Gage). 그가 다이너마이트에 화약을 다지려고 쓰던 쇠막대의 길이는 약 1미터, 직경은 약 3센티미터, 무게는 6킬로그램. 그 막대가 폭발과 함께 그의 왼쪽 광대뼈 아래로 들어가 두개골 정수리 위로 빠져나갔다.
피니아스는 죽지 않았다.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서, 농담을 한 채로 의사가 오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두 달 뒤 그는 일어나서 걸어다녔고, 그 후 11년을 더 살았다. 신체적으로는 회복된 것이다.
그러나 회복된 그는 더 이상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사고 전 그는 동료들에게 가장 능력 있는 십장으로 꼽히던 사람이었다. 책임감 있고, 결정이 빠르고, 부하들을 잘 이끄는 사람. 사고 후 그는 일자리를 잃었다. 다음 일자리에서 또 잃었다. 결정을 못 했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친구들과의 관계가 망가졌다. 그를 진찰한 의사 존 할로(John Harlow)는 짧은 한 줄을 기록에 남겼다.
"Gage는 더 이상 Gage가 아니다."
피니아스 게이지의 두개골은 19세기 의학에서 가장 유명한 수수께끼가 됐다. 지능이 멀쩡한데, 기억이 멀쩡한데, 언어가 멀쩡한데 — 무엇이 사라진 건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어떤 한 가지가 그 쇠막대와 함께 빠져나간 것은 분명한데, 그 한 가지의 이름이 무엇인지 누구도 짚지 못했다.
피니아스의 두개골은 지금도 하버드 의대 와렌 해부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 두개골 위에 답을 찾아낸 사람이 한 명 있다. 1994년이 되어서야 도착한 답이었다.
그 사람이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부인이자 평생의 공동연구자인 한나 다마지오(Hanna Damásio)였다. 그녀가 컴퓨터로 게이지의 두개골을 3차원으로 재구성해서, 그 쇠막대가 정확히 어느 부위를 관통했는지 알아냈다. 결과는 양쪽 안와전두피질(orbitofrontal cortex)과 복내측 전전두엽(ventromedial prefrontal cortex). 학술 용어가 어려운데, 짧게 풀면 "감정 신호와 합리적 계산이 만나는 자리"다. 두 다마지오 부부는 1994년 학술지 〈사이언스〉에 이 결과를 발표하면서 한 가지를 결론지었다. 게이지가 잃은 것은 지능이 아니라, 감정 신호가 결정에 끼어들어 오는 다리였다고.
여기까지가 1848년에 한 쇠막대가 던진 질문에 대한 1994년의 답이다. 그러나 이 답은 한 사람의 19세기 사례로 끝날 수도 있었다. 그 답이 일반적인 원리로 굳어지려면, 두 다마지오 부부의 진료실에 살아있는 한 환자가 같은 자리에 와줘야 했다.

2막. 1982년 — 한 변호사가 식당 메뉴 앞에서 30분을 보냈다
1982년, 한 30대 변호사가 아이오와 대학병원의 안토니오 다마지오 진료실로 들어왔다. 환자 보호 차원에서 다마지오는 그의 가명을 엘리엇(Elliot)이라고만 적었다. 엘리엇은 미국 동부의 한 도시에서 성공한 변호사이자 비즈니스맨이었다. 두 아이의 아버지, 화목한 가정의 가장. 그러던 어느 날 머리가 자꾸 아파지더니, 검사 결과 전두엽에 종양이 발견됐다. 종양은 양성이었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수술 후 엘리엇의 IQ는 사고 전과 동일했고, 학자들이 측정한 그의 지능 점수는 "우수"에 해당했다. 기억력, 언어 능력, 공간 인지, 수학 계산 — 모든 검사에서 정상 이상의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 그는 다시 일을 못했다.
다마지오가 1994년 책에 기록한 한 장면이 있다. 엘리엇을 점심 식당에 데려간 날의 이야기. 식당 메뉴를 받아든 엘리엇은 첫 줄부터 마지막 줄까지 한 음식 한 음식 합리적으로 검토를 시작했다. 가격은 적절한가. 영양은 균형 잡혔는가. 어제 비슷한 것을 먹지는 않았는가. 30분이 지나도 엘리엇은 무엇을 주문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다마지오가 보다 못해 한 가지를 추천하자 그제야 주문이 끝났다.
다른 사례도 있었다. 사무실에서 자기 책상 위의 서류를 분류하는 일에 그는 한 시간을 썼다. 모든 분류 기준 — 날짜, 주제, 중요도, 발신자 — 을 머릿속에서 다 떠올렸고, 각 기준의 장단점을 머릿속에서 다 계산했다. 그러나 어느 기준을 고를지 결정하지 못했다.
엘리엇이 첫 일자리를 잃은 뒤, 그는 한 사기꾼에게 전 재산을 투자해 모두 잃었다. 두 번째 결혼도 사기에 가까운 결혼이었고 곧 끝났다. 그가 의료보험을 통해 다마지오의 진료실에 도착했을 때, 그는 더 이상 변호사도 아니었고 가장도 아니었다.
검사 결과 엘리엇의 종양 수술 부위는 양쪽 복내측 전전두엽 — 게이지가 1848년에 쇠막대로 잃었던 그 자리였다.
여기서 다마지오가 던진 결정적 질문이 있다. 엘리엇은 지능이 멀쩡하다. 합리적으로 모든 옵션을 다 계산할 수 있다. 그런데 결정을 못 한다. 무엇이 빠진 건가.
다마지오는 엘리엇을 진료실에서 한 가지 더 검사했다. 끔찍한 사고 현장 사진들 — 화재 피해자, 자동차 사고, 자연재해 — 을 그에게 보여줬다. 정상인이 보면 본능적으로 몸이 움찔하는 사진들이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나고, 가슴이 빨라진다. 엘리엇은 모든 사진을 끝까지 봤다. 사진을 정확히 묘사할 수 있었다. 어느 것이 비극적인지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몸에서는 아무 신호도 나오지 않았다. 손바닥 땀도, 가슴의 흔들림도, 없었다. 검사 후 엘리엇은 다마지오에게 한 마디를 남겼다.
"선생님, 저는 이 사진들이 끔찍하다는 것을 압니다. 다만, 더 이상 그것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다마지오는 이 한 줄이 답이라고 봤다. 엘리엇이 결정을 못 하는 이유는 합리적 능력의 부족이 아니다. 합리적으로 옵션을 다 계산한 뒤, 그중 어느 하나를 "이거"라고 고르는 마지막 한 발자국이 사라진 것이다. 그 한 발자국은 합리적 계산이 아니라, 몸에서 올라오는 미세한 신호 — "이건 좋아", "이건 위험해" — 라는 것이다.
이 신호의 이름을 다마지오는 1991년 학술 논문에서 처음 제안하고, 1994년 출간한 책의 핵심 가설로 다시 정리했다. 책의 제목이 그의 평생을 대표하는 한 줄이 된다.
"데카르트의 오류(Descartes' Error)."

3막. 1994년 — 한 도박 실험이 30년 신경과학을 뒤집은 자리
『데카르트의 오류』가 책 제목이 된 이유는 짧다. 데카르트가 17세기에 한 한 줄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이 그 후 350년 동안 서양 철학에 한 가지 전제를 새겨놓았기 때문이다. 이성이 본체이고, 감정은 그 본체를 흐리는 부속물이라는 전제. 합리적 결정이란 감정을 옆으로 치워두고 머리로만 따져야 가능하다는 전제. 비즈니스 책의 절반, MBA 커리큘럼의 절반, 그리고 — 이게 6편의 핵심이다 — 인공지능 70년 역사의 절반이 이 전제 위에서 작동했다.
다마지오가 1994년 그 책에서 던진 답은 이것이다.
데카르트가 틀렸다. 감정은 이성의 적이 아니라, 이성이 결정에 도달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로다.
이 한 줄을 그는 책 한 권으로 풀었고, 그 책의 핵심 증거가 1994년 같은 해에 그와 그의 동료들이 진행한 한 도박 실험이었다. 실험의 이름은 아이오와 도박 과제(Iowa Gambling Task). 안토니오 바카라(Antoine Bechara), 한나 다마지오, 다니엘 트라넬(Daniel Tranel)이 함께 설계했다.
실험은 단순하다. 피험자 앞에 네 벌의 카드 A·B·C·D를 두고, 한 번에 한 장씩 자유롭게 뽑으라고 한다. 각 카드에는 돈을 따는 양과 잃는 양이 적혀 있다. 100장 정도 뽑으면 게임이 끝난다.
카드 A와 B는 한 번 뽑을 때 큰 돈을 따게 해준다. 그러나 가끔 그보다 훨씬 큰 손실이 나온다. 평균적으로는 손해 보는 카드다. 카드 C와 D는 한 번 뽑을 때 작은 돈을 따게 해준다. 손실도 작다. 평균적으로는 이득 보는 카드다.
정상인이 이 실험을 하면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다. 40장에서 50장 정도 뽑은 시점에,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C·D 카드 쪽으로 손이 가기 시작한다. "왜 그 쪽으로 손이 가나요"라고 물어보면 그들은 "그냥 느낌이"라고 답한다. 80장 정도 뽑은 시점에 가서야 그들은 의식적으로 "아, A·B가 손해 보는 카드구나"라고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결정적인 한 가지가 있다. 정상인이 A·B 카드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는 미세한 땀이 나기 시작한다. 학술적으로는 피부전도반응(SCR, skin conductance response)이라고 부르는 신호다. 이 신호는 의식보다 빠르다. 의식이 "A·B는 손해 보는 카드"라고 알아채기 30장 전에, 몸이 이미 답을 먼저 낸 것이다.
엘리엇처럼 복내측 전전두엽이 손상된 환자들도 같은 실험을 했다. 결과가 충격적이었다. 그들은 100장을 다 뽑을 때까지 A·B 카드를 계속 뽑았다. 손해를 봤다. 실험이 끝난 뒤 "어떻게 해야 했는지 알려달라"고 하면 그들은 정확히 말할 수 있었다. "A·B는 손해 보는 카드입니다." 그러나 다시 실험을 시키면, 그들은 또 A·B를 뽑았다. 합리적으로 알지만,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손바닥에서는 끝까지 땀이 나지 않았다.
이 실험이 신경과학에서 한 가지를 결정적으로 정리했다. 결정은 의식적 추론이 다 끝난 다음에 머리에서 내려오는 일이 아니다. 결정은 몸에서 먼저 올라오는 신호 위에 의식적 추론이 얹히는 일이다. 몸에서 신호가 올라오지 않으면, 의식이 아무리 합리적으로 따져도 마지막 한 발자국에 도달하지 못한다.
다마지오는 이 신호에 이름을 줬다. 신체 표지자(somatic marker). 한 가지 옵션이 "좋다" 또는 "위험하다"고 몸에 새겨진 표지. 옵션이 의식에 떠오르는 순간, 이 표지가 함께 떠오른다. 우리가 일상에서 "직감"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히 이 신호다.
다마지오의 결론이 한 줄로 정리된다. 결정은 합리 + 감정의 합산이 아니다. 결정은 감정 신호 위에 합리가 마지막 한 칸을 건너뛰는 일이다. 그 신호가 사라지면, 아무리 합리적으로 따져도 결정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4막. 같은 자리에서 본 LLM의 망설임
이 결론을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챗봇 위에 얹어보면 흥미로운 일이 일어난다.
대형 언어 모델 — ChatGPT나 Claude 같은 챗봇의 본체이고, 영어로는 LLM이다 — 이 한 가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자리에 갔을 때, 그 모델이 보이는 행동을 한번 떠올려보자. "제 입장에서는 양쪽 모두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실지는 대표님께서 회사 상황을 가장 잘 아시기에…" "결정에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고려하시면 좋겠습니다 — 1. 비용 2. 시간 3. 인력…"
이 답들은 모두 합리적이다. 어느 한 줄도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결정이 거기서 나오지는 않는다. 옵션들을 다 펼쳐주는 그 자리에서 모델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다.
엘리엇이 1982년 식당 메뉴 앞에서 30분을 보낸 그 장면과 결이 같다.
대형 언어 모델 안에는 신체가 없다. 손바닥이 없으니 땀이 나지 않는다. 가슴이 없으니 빨리 뛸 일이 없다. 항상성이 없으니 어느 옵션이 자기 균형을 깨는지 안 깨는지에 대한 신호가 들어오지 않는다. 이 모델이 옵션 A와 B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 손이 가는 결정을 내리려면, 다마지오가 말한 신체 표지자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없다.
대신 이 모델이 하는 일이 한 가지 있다. 학습 데이터에 있던 인간 수만 명의 결정의 평균을 출력하는 일. 그래서 답이 평균에 수렴한다. 그래서 답이 옵션들의 나열에 멈춘다. 그래서 답이 결정을 사용자에게 다시 떠넘긴다.
이게 일상에서 흔히 "할루시네이션"이나 "결정 회피"라고 부르는 현상의 한 가지 깊은 정체다. 모델이 거짓말을 한다거나 게으르다는 문제가 아니다. 모델이 결정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는 신체 신호의 다리 자체가 처음부터 없는 것이다.
5편에서 우리는 카파시가 Tesla에서 5년을 살아낸 끝에 도달한 결론을 봤다. 인간 운전자 데이터를 신경망에 아무리 먹여도, 신경망은 인간이 안 한 행동의 결과를 모른다는 것. 다마지오의 자리에서 같은 결론을 보면 한 단 더 깊다. 신경망은 자기 결정의 결과가 자기 몸을 어떻게 흔들지를 모른다. 그 흔들림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 운전자가 옆 차의 갑작스러운 끼어듦 앞에서 핸들을 꺾는 그 한 순간, 그가 의지하는 신호는 도로 데이터의 평균이 아니라 자기 가슴에서 올라오는 미세한 경고다. 그 신호가 없는 시스템이 어떻게 그 한 순간을 살아낼 수 있나.
3편에서 다룬 도파민 신호도 같은 자리에 있다. 도파민은 사탕이 아니라 놀라움이라는 것 — 예측한 보상보다 더 좋거나 나쁜 결과가 왔을 때 신경세포 한 다발이 보내는 신호다. 다마지오의 신체 표지자가 이 신호의 더 큰 회로다. 도파민이 한 시점의 놀라움이라면, 신체 표지자는 그 놀라움이 누적되어 한 옵션에 매겨진 평생의 점수다. 두 신호 모두 신체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게 다마지오가 2021년의 책 『Feeling & Knowing』에서 한 줄로 정리한 자리다. 그가 적은 영어 문장을 한국어로 옮기면 이렇다.
인공지능은 자연 지능을 가능하게 만든 한 가지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항상성의 명령을 짊어진 살아있는 신체를.
그가 노년에 도달한 이 한 줄이 우리가 매일 책상에서 챗봇을 켤 때 마주하는 그 망설임의 정체다.
5막. 르쿤이 그린 세계 모형 — 그 안에도 빠진 한 가지
5편에서 우리는 얀 르쿤이 카파시의 추론 회로 답에 던진 카운터를 다뤘다. 르쿤의 입장은 "추론 회로조차 답이 아니다. 신경망 안에 세계의 모형을 직접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세계 모형(World Model)"이라고 부르는 답이다.
다마지오는 이 카운터에 또 한 카운터를 던진다. 한 단 더 깊은 자리에서.
세계의 모형을 신경망 안에 만든다고 해보자. 그 모형 안에서 미래의 가능한 가지들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고 해보자. 그래도 한 가지가 남는다. 그 모든 가지 중 어느 것이 "좋은" 가지인지 결정하는 기준이 어디서 오는가.
인간의 머릿속 세계 모형에는 기준이 들어있지 않다. 기준은 신체에서 올라온다. 어느 미래의 결과가 자기 항상성을 깨는지 — 배고픔, 위험, 외로움, 통증 — 에 대한 신호가 신체에서 끊임없이 올라오기 때문에, 그 신호가 시뮬레이션된 미래의 각 가지에 점수를 매긴다. 이 점수가 없으면 시뮬레이션은 그저 가능성의 나열에 머문다.
다시 말하면, 르쿤이 그린 세계 모형은 항상성을 가진 신체와 결합되지 않으면 결정자가 되지 못한다. 시뮬레이션 머신은 될 수 있다. 그러나 결정자는 아니다.
이게 다마지오 사상의 가장 도발적인 한 자리다. 거대 인공지능 회사들이 매주 새로 발표하는 기술 — 더 큰 모델, 더 깊은 추론, 더 정교한 세계 모형 — 이 모두 한 단을 미루고 있을 뿐이라는 것. 어느 단까지 가도 신체와 항상성이 결합되지 않으면, 그 시스템은 결정의 마지막 한 발자국에서 멈춰 선다는 것.
물론 정직하게 짚어야 할 한 가지가 있다. 다마지오의 답이 모든 자리에서 옳지는 않다. 챗봇이 답해야 하는 자리의 대부분은 진짜 결정의 자리가 아니라 정보 정리의 자리다. 정보를 정리하는 자리에서는 신체가 없어도 평균이 답이다. 다마지오가 깨는 자리는 그 자리가 아니라, 한 회사의 다음 분기를 결정해야 하는 자리, 한 환자에게 어느 치료를 권할지 결정해야 하는 자리, 한 가족의 이사를 결정해야 하는 자리다. 이런 자리에서는 평균의 답이 결정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모두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다마지오가 그 느낌의 이름을 신체 표지자라고 적었을 뿐이다.

6막. 패션회사 buyer가 마지막에 "이거"를 고르는 결정
여기서 우리 회사 운영으로 다시 넘어와 보자. 시리즈 3편에서 4편, 5편으로 이어진 한 가지 사례 — 패션회사의 매달 사입 — 을 다마지오 자리에서 다시 본다.
패션회사 buyer가 한 달에 한 번 중국과 베트남 현지에 사입을 다닌다. 사입은 현지 공장에서 다음 한 달 팔 제품을 직접 골라 들여오는 일이다. 현지 공장에서 buyer가 마주하는 후보 제품은 수천 가지다. 우리 시스템은 이 buyer에게 한 가지를 제공한다 — 회사의 인격을 데이터로 정리한 위에 시뮬레이션 트리를 두어 다음 한 달의 트렌드와 매출을 예측한 결과다. 4편과 5편에서 풀었던 그 메커니즘이다.
그런데 buyer가 시뮬레이션 결과를 받고 사입장에 들어갔을 때, 그가 마지막에 "이거"를 고르는 한 순간이 있다. 시뮬레이션이 가리키는 후보 다섯 개 중 어느 것을 진짜 가져갈지를 buyer의 손이 결정한다. 그 손이 한 옷을 만졌을 때 "이거다"라는 신호가 가슴에서 올라오고, 다른 옷을 만졌을 때 "아닌데"라는 신호가 올라오는 그 한 순간. 그게 정확히 다마지오가 1994년에 신체 표지자라고 부른 신호다.
우리 시스템은 이 신호를 대체하지 않는다. 우리는 buyer가 그 신호에 도달하기 직전까지의 모든 합리적 계산을 우리 시스템 안에 가져다 둘 뿐이다. 시뮬레이션 트리, 작년 같은 달 매출 패턴, 트렌드 분기점, 인플루언서 신호. 이 모든 합리적 계산이 buyer 손바닥에 정리되어 도착하면, 그 손바닥 위에서 buyer의 신체가 마지막 한 발자국을 결정한다.
이 사상이 METAL AI의 운영을 한 가지로 단단히 잡아준다. 우리는 인간을 대체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이 신체 표지자를 가장 정확히 발휘할 수 있는 자리까지 합리적 계산을 모두 끌어다 줄 뿐이다. 결정 자체는 인간의 신체가 한다.
이게 우리가 클라이언트마다 매일 일하는 자리의 결이다. 4편에서 알파고가 했던 미래 가지의 시뮬레이션, 5편에서 르쿤이 그린 세계 모형까지를 다 가져다 두되, 마지막 한 발자국 — 클라이언트 회사의 신체 표지자 — 만큼은 클라이언트의 사람 손에 맡긴다. 그 손이 어느 옵션을 만질 때 가슴에서 올라오는 신호가, 어떤 모형도 대체할 수 없는 마지막 결정자다.
클라이언트가 우리에게 가장 자주 묻는 한 가지 질문이 있다. "그러면 모든 결정을 다 자동화해야 하나요." 우리 답은 단호하다. 아니다. 자동화해야 할 자리는 결정 직전까지의 모든 합리적 정리이지, 결정 그 자체가 아니다. 결정의 자리에는 클라이언트 회사의 사람이 자기 신체와 자기 항상성을 가지고 들어와야 한다. 그 자리를 우리가 비워둔다.
다마지오가 1994년 한 환자의 식당 메뉴 30분으로 가르쳐준 한 가지가 이것이다. 모든 합리적 계산을 다 끝낸 뒤 결정에 도달하지 못하는 시스템은, 결국 누군가에게 결정을 떠넘긴다. 챗봇이 사용자에게 떠넘기듯이, 엘리엇이 다마지오에게 식당 메뉴 추천을 부탁하듯이.
결론
데카르트가 17세기에 한 한 줄이 그 후 350년 동안 서양 철학을, 의학을, 비즈니스를, 그리고 인공지능 70년 역사를 한 방향으로 기울게 만들었다. 이성이 본체이고, 감정은 그 본체를 흐리는 부속물이라는 한 줄.
다마지오가 1994년 한 권의 책에서 그 한 줄을 깼다. 감정은 부속물이 아니라 이성이 결정에 도달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로라는 것. 한 환자의 식당 메뉴 30분이 그 증명이었다. 한 도박 실험의 손바닥 땀이 그 증명이었다. 한 쇠막대를 1848년에 맞은 한 십장의 11년이 그 증명이었다.
그리고 그가 노년에 도달한 한 줄이 우리가 매일 책상 앞에서 마주하는 그 챗봇의 망설임의 정체를 가리킨다. 인공지능은 자연 지능을 가능하게 만든 한 가지 — 항상성의 명령을 짊어진 살아있는 신체 — 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한 줄.
시리즈 1편의 끝에서 우리는 마빈 민스키의 한 줄을 남겼다. 지능의 힘은 단 하나의 완벽한 원리가 아니라, 우리의 광대한 다양성에서 비롯된다고. 시리즈 6편의 끝에서 우리는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한 줄을 더한다. 그 다양성이 한 가지 결정으로 좁혀지는 마지막 한 발자국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 만든다고.
GPT를 만든 사람이 자율주행을 5년 살아낸 끝에 신경망에 추론 회로를 얹어야 한다고 말했다. 르쿤이 추론 회로 위에 세계 모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마지오가 그 세계 모형 위에 살아있는 신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한 단 한 단 깊어지는 답들이 모두 한 자리를 향한다. 결정이라는 자리. 합리만으로는 닿지 못하는 자리.
METAL AI가 매일 그 자리에서 일한다. 우리는 합리의 자리에 인공지능을 끌어다 두고, 결정의 자리는 클라이언트의 사람에게 비워둔다. 그 비워둔 자리에서 클라이언트의 신체가 마지막 한 발자국을 결정하는 그 순간이, 우리가 1994년 다마지오의 한 권의 책을 통해 만난 한 가지 답을 매일 살아내는 자리다.
데카르트의 오류 위에 350년의 서양 사상이 서 있고, 그 350년의 끝자락에 인공지능 70년이 서 있다. 그 오류를 깬 한 사람의 책 한 권 위에 우리 회사가 매일 한 걸음씩 디딘다.
— 김현국 (Hyunkook Kim) · METAL AI 대표 · 2026년 5월 17일 (일)
